2009/01/29 11:14 | REVIEW




  개인적으로 나는 오트슨이란 작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확실히 싫어하는 축에 들었다. 그 이유는 내가 읽어본 유일한 오트슨의 책 -미얄의 추천- 때문이었다.

  미얄의 추천. 라노베 좀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다 알 거다. 그렇다. 쓰레기같은 괴작(심지어 플롯도 짜이지 않은)을 쏟아내며 우리나라 라노베의 얼굴을 더럽힌 시드 노벨에서 대표작으로 내걸고 있는 셋 중 하나다. 솔직히 나는 궁금했다. 그 쓰레기같은 시드노벨 쪽에서 대표작이란 간판을 내건 작품은 어느 수준이며, 그렇게 판매고를 날리신다는데 과연 글발이 어느 정도일까. 그리고 읽었다. 감상은? "......."

  도대체 왜 이런 책이 대표작이라 불리우는지도 알 수 없었고 사람들이 그렇게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해대는지도 알 수 없었다. 어설프게 라노베 전개 방식을 흉내내며 작가는(그리고 작가의 분신인 미얄은) 이리저리 동분서주하지만 이야기는 채 재단되지 않은 천처럼 너덜거린다. 캐릭터는 전형적이다 못해 심지어 후반에 가서는 엉망진창으로 성격까지 뒤틀리며, 딱히 매력적인 구석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나마 유일한 장점이라 할 수 있는 '아이디어'조차도 형체를 이루지 못한 글 속에서 천천히 압사당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결국 나는 실망해서 4권 쯤에서 책을 내려놓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그런 끔찍한 독서 이후 나는 오트슨이라는 작가를 싫어하게 되었다. 당연한 일이다. 나는 재미없는 소설을 쓰는 작가가 싫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나 보다. 내가 리뷰를 찾으러 들어가는 수많은 블로그들은 거의 다 오트슨을 찬양, 또 찬양하고 있었다. 보다가 열불이 난 나지만 그런 나에게도 어쩔 수 없는 그들만의 통일된 논리가 있었으니.

「오트슨은 라노베에 맞는 작가가 아니다.」
「오트슨을 알기 위해서는 '갑각나비'를 봐라!」

  말인즉슨 오트슨은 라노베의 형식과 상업성 등에 익숙치 않은 작가이며 그렇기 때문에 미얄의 추천은 평소 필력보다 좀 딸리게 나오셨고 미출판 전작인 (드림워커에서 연재) 갑각나비야말로 그 필력이 꽃을 피우는 정점이란 것이다. 이런 그들에게 내가 뭔 얘기를 하려고 해봤자 '갑각나비도 안 읽은 주제'라는 소리를 들을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결국 나는 갑각나비를 읽기로 결심했다. 나의 충실한 '안티 본능' 탓도 있었겠지만, 글쎄, 사실은 그냥 궁금했다. 대체 사람들이 이렇게 극찬을 해대는 그 소설은 무엇일까, 하고.

  그리고 읽었다. 그리고 나는 순식간에 오트슨의 팬이 되버렸다. 세상에. 그리고 지금 나는 밤을 새서 갑각나비를 읽느라 벌개진 눈으로 모니터 앞에 앉아서 무슨 중요한 역사의 산증인이 된 것만 같은 의무감과 함께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다. 요약하자면 "여러분, 그 말이 맞았어요! 진짜에요! 오트슨은 갑각나비를 읽어봐야 하는 거였어요! 저도 드디어 '갑각나비 매직'에 걸렸나봐요!" 라는 것이다. 정말 놀랍지 않은가. 그렇게 삐딱한 심정으로 오트슨을 보던 채 완결도 되지 않은 웹 연재분 소설을 보고는 순식간에 팬이 됐음!! 하고 선언하다니.

  하지만 갑각나비에는 그만큼의 매력이 있었다. 그것은 그 소설과 함께 따라다니는 뒷소문- '갑각나비를 보고 절망한 많은 사람들이 펜을 꺾었다더라'이 신빙성있게 느껴질 정도로 엄청난 매력이었다. 그리고 나는 오트슨의 팬이 됐다. 단순히 여기에서 그친다면 나는 짤막한 3줄 감상이나 쓰며 갑각나비를 추억하고 거기서 모든 것을 그만뒀을 것이다. 좋아하는 작품 리스트에 갑각나비라는 네 글자를 새겨놓고서 말이다.

  하지만 나는 굳이 여기서 장문의 리뷰를 줄줄 써제끼고 있다. 이유가 뭐겠는가. 뻔하지. 그놈의 미얄의 추천 재등장이시다. 나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그 둘을 같은 작가가 썼다는 것을, 똑같은 오트슨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렇다고 오해는 하지 말지어다. 나는 여기서 미얄의 추천과 갑각나비를 붙여보려는 것은 아니다. 내가 뭐하러 그런 짓을 하겠는가. 결과가 뻔할 뻔자인데(갑각나비의 KO승이겠지). 다만 내가 하려는 것은 의문의 제시다. 그리고 그에 대한 어줍잖은 갓 팬이 된 독자로서의 가설과 감상이다. 그렇지 않은가. 오트슨이 마법의 왼팔로 갑각나비를 쓰다가 어느 날 불의의 사고로 왼팔을 다친 후 보통인 오른팔로 미얄의 추천을 쓰는 것이 아닌 이상, 누가 봐도 갑각나비--->미얄의 추천은 이상한 행보란 말이다. 퇴보도 그런 퇴보가 없다. 만약 후자에서 전자로 갔다면 '엄청난 발전을 이뤘군요. 축하합니다.' 하고 박수 한번 쳐주면 된다지만 이건 대체 뭔가? 울어야하나, 웃어야하나??

  그런 의문이야말로 나의 오늘 새벽의 모든 것이었다. 글을 내려놓고 잠들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인지라 힘없이 눈만 깜박거리는데 그 앞으로 미얄의 추천과 갑각나비가 보였다. 몇번이고 그 둘은 겹쳐지려 노력하며 이렇게 외쳤다. '우리 같은 작가가 썼음!' 근데 어쩌냐. 나는 도저히 겹쳐보이질 않는데. 캐릭터나 스토리 구성 능력, 문체같은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들은 작가의 노력 여하에 따라서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따라서 만약 그런 것들이 달라진 것이라면 나는 순순히 작가가 누군가를 좆나 필사하다가 창작을 담당하는 뇌 부분이 약간 삐끗했음을 인정하고 물러섰을 것이다. 하지만 그 둘은 달랐다.

갑각나비------>미얄의 추천

이 사이에는 무언가, 엄청나게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는 것만 같았다. 대체 다른 게 뭐요? 라고 누가 물어봐서 다른 점을 하나하나 읊다보면 그 수가 끝이 없어서 결국 '아 그냥 다르다고!'하고 비명을 지르게 되어버리는, 그런 차이가 말이다. 마치 톨스토이와 히가시노 게이고처럼.

  결국 나는 의문과 싸우며 뜬눈으로 새벽을 지새워 해가 뜨는 것을 보았고, 이런 결론을 내렸다.

「오트슨은 라노베에 맞는 작가가 아니다.」

내가 이런 똑같은 소리를 지껄이게 될 줄이야. 씨발, 정말 미치겠다. 독자들도 그런 심정일 것이다. 결국 이런 얘기하려고 이 긴 글을 쓴 거냐고. 그래도 걱정마라. 나는 이 얘기 한마디로 모든 것이 종결될 거라 믿는 소위 오트슨 광팬분자랑은 다르게 빠방한 논리를 준비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이 리뷰의 본론이고 말이다. 밑에서 적겠다.









  우선 첫번째로 할 이야기는 이것이다. 많은 사람들의 착각과는 달리 '오트슨은 실력이 늘었다'. 갑각나비--->미얄의 추천의 이 행보는 스토리텔러로서는 퇴화일지는 몰라도 작가로서는 확실한 진화이며 발전이다. 뭔 소리냐고?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라노베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라노베. 즉 라이트노벨은 얼핏 보면 별 거없는 가벼운 소설이라는 인상을 주지만 사실 이 책도 나름 까다롭다. 즉 지켜야 할 선이 있고 규칙이 있는 것이다. 그 중 라노베 매니아들이 입에 게거품을 물고 읊어대는 것이 하나 있으니. 그것이 바로 「라노베는 한 권, 한 권으로 시나리오가 마무리되어야한다」이다. 이해하기 힘들면 그 유명한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을 생각해보라.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이 인기를 끈 이유는 무엇보다도 귀여운 캐릭터와 애니메이션에 있겠지만 그보다 선행되는 하나의 이유는 시리즈의 스타트를 끊은 그 일권이 매력적이라는 점에 있다. '세상에 권태를 느끼던 소녀가 한명의 남자로 인해 세상에 다시 돌아온다' 이렇게 그 일권은 시나리오적 일관성을 가지고 있으며 마지막에 드러나는 위기상황과 포니테일로서 확실히 '마무리'가 된다. 알고 보면 가장 라노베의 형식에 충실한 책인 것이다. 그리고 라노베 매니아들은 그에 뜨거운 판매부수로 보답했다.

이제 슬슬 감을 잡았을 것이다. 아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오트슨이 책을 출판하기로 마음을 먹고 시드노벨 사와 계약을 맺었을 때부터 그에게는 그 무거운 '형식'의 짐이 얹혀진 셈이라는 것을. 오트슨은 갑각나비에서 -흔히 많은 사람들이 말하듯이- '실험적인' 전개를 많이 사용했다. 괄호를 통해 글에 해석의 여지를 주(지 않)거나 선택지식 진행(#글의 처음 부분으로 가시오), 시간을 역행하는 것을 뛰어넘어 독자로 하여금 아무것도 가늠하지 못하도록 하는 기괴하게 섞인 전개(악마부터 이어지는 엔쥬 이야기)라던가 말이다. 라노베의 형식에서 어긋난다는 것은 두번 따져볼 필요도 없다. 그는 자신의 최대 장기였던 그 '실험적인 전개'를 포기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왜? 그것이 라노베니까.

그리고 미얄의 추천이 나왔다. 라노베의 형식을 한숨이 나올 만큼 충실히 따르고 있는 글이었다. 어설프게라도 한 권이 끝날 때마다 거기서 점을 찍으려 노력하는 책. 마치 페이지 하나 하나가 '나는 라노베임!'하고 외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의 전개의 특징이었던 기묘함이나 실험적인 성격은 온데간데 없이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이해하기 쉽게, 전형적으로 이어지는 그 흐름만이 그곳에 있었다. 지독한 미얄의 추천 안티였던 나로서도 그 책을 '라노베스럽지 않다'라고 욕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 그만큼 그는 라노베의 형식에 충실했다. 그리고 그것은 감히 내가 예상하건대, 그에게 눈물어린 창작의 고통과 시련을 내려주었을 것이다.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상상력에 필터를 끼우는 법을 배운 것이다.

내가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닌 바, 뭐라 함부로 하긴 힘들지만 글은 그렇다. 글은 자신의 상상력이나 생각을 그대로 써내는 것이 아니다. 글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만 나오는 것이다. 상상력에 필터를 끼워 그것을 비춰내고 그것을 활자로 좇는 것이 글인 것이다. 하지만 오트슨은 그렇지 않았다. 오트슨은 갑각나비에서 상상력을 여과없이 드러냈다. 그에게 글의 형식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것은 글이 아니니까. 가끔씩 전개의 강약을 주는 면이 있어 마치 글처럼 보였지만 사람이 혼자 상상하면서도 어느 부분에서는 흥분하고 어느 부분에서는 풀이 죽듯 그것은 당연한 이야기의 면모일 뿐이었다. 그는 글이 아니라 이야기를 했다. 자신의 머릿속에 담겨진 모든 것을, 그대로. 가끔씩 혼란스럽게 꼬이고 전개가 얽히며 말도 안되는 이야기가 나오는 그 세세한 면까지 모두 그대로 그는 우리에게 갑각나비를 전해주었다.

그래서 우리는 갑각나비를 좋아했나보다. 필터를 걸쳐진 반들거릴 정도로 매끄러운 글에만 익숙해져있던 우리에게 매끄럽지 못한 질감의 그 이야기는 신비로웠고 새로웠다. 그리고 확실히 오트슨은 스토리텔링에 대해서는 뛰어난 재능이 있던 듯 싶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그대로 출판해낼 수는 없었다.

결국 그는 필터를 끼웠다. 이는 작가로서는 분명 칭찬받아야 할 마땅한 진보고 발전이다. 그는 드디어 글을 쓰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는 그의 이야기를 기대하며 책을 집어든 우리에게는 엄청난 실망감을 안겨주었던 것이다. 게다가 솔직히, 오트슨은 글에는 재능이 없다.


  두번째로 할 얘기는 캐릭터에 대한 것이다. 이제 슬슬 몸이 피곤해져오므로 짤막하게 써보도록 하겠다.

라노베의 다른 이름을 아나? 오쓰다 에이지가 주장했었나. 아무튼 라노베에게는 캐릭터 소설이라는 또 다른 이름이 있다. 정말 주장하는 바가 확실히 드러나는 솔직한 이름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스토리보다 캐릭터가 중요합니다'라 외쳐대고 있는 모습이 눈에 선하지 않은가.

그 솔직한 이름이 말하는 대로 라노베의 스토리는 캐릭터를 꾸미고 그 모습을 더 드러내게 하는 데에 의미가 있으며, 심지어 그 스토리마저도 캐릭터들이 이끌어나간다. 체스가 말들의 움직임에서 나오는 한편의 대서사시인 것처럼, 라노베는 캐릭터의 움직임에서 나오는 한편의 소설인 것이다. 이는 라노베를 좀 읽어봤다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기초 상식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풀메탈패닉>이 이 법칙을 잘 준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는 가엾게도 또 오트슨을 옭아매는 족쇄가 되었다. 솔직히 말해보라. 오트슨이 캐릭터들의 움직임과 그들의 대치를 이용해 글을 쓰던 사람이던가? 아니다. 아까도 말했듯이 그는 머릿속에 있는 것을 그대로 옮겨대던 사람이었고 그것은 잠들기 전의 공상과 같은 것이었다. 단언컨대 그는 치밀한 플롯과 복선, 대립보다는 마음이 내키는 대로 신비한 상징을 찾아가며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사람이다. 공상 속에서 우리는 이것이 공상일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고, 질타를 던질 만한 독자가 없기 때문에 그 이야기를 맘대로 조종한다. 죽이고, 살리고, 말도 안되는 이야기가 등장하며, 시간 순서는 꼬이고, 사실 그는 그거였고.. 이하생략.

물론 오트슨도 최소한의 구조와 틀은 갖추고 있었다. 그는 갑각나비에서 에밀리아와 티밀리아가 어떤 이유(개와 집사)를 두고 레이즈를 쫓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는 어떤 대립 구조라기 보다는 그들로 하여금 레이즈의 기적을 되짚게 하면서 서술을 편하게 하는 데에 그 의미를 두고 있었다. 즉, 기본적인(흔해빠진) 쫓고 쫓기는 긴장감이라던가, 나타나는 복선, 배신같은 요소는 없다. 그저 그들은 하릴없이 그들을 쫓아가고 그들의 기적을 읊어준다. 게다가 그것도 잠깐. 이야기 대결이라든가 또 다른 인물들이 중구난방으로 솟아오르는 가운데 갑각나비는 무언가를 쫓는 박진감이나 기승전결보다는 점차 하나의 공상의 모습에 가까워진다. 또 다시 여기서 라노베와 어긋나게 되는 것이다.

결국 또 그는 라노베의 법칙에 순응했다. 그는 미얄에게 추천을 주고 소령(맞나?)에게 천추를 주었다. 라노베의 법칙을 지키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인 '라이벌 구도' 말이다. 참 웃기지도 않는 일이다. 갑각나비를 쓰던 작가, 오트슨이 그런 흔해빠진 구도에 손을 벌릴 정도로 이야기가 모자랐는지. 그것 뿐만이 아니다. 미숙한 손놀림으로 필터를 끼우고 낸 첫 작품인만큼 그는 어쩔 수 없이 흔해빠진 구도들을 퍼오고 또 퍼왔다. (쯧쯧쯧..)
 
학교 여선배인 초록 -> 그러나 사실은 중요한 인물 -> 미얄과 연애구도에서 대립.
익살맞은 악우.
신비로운 등장, 만남의 미소녀 -> 그 존재도 또 엄청 미스테리, 오컬트!
조직들의 대립 -> 조직의 비밀
대립하는 두 미소녀 -> 그 이유는?

쓰다보니 지친다. 이제 슬슬 그만두련다. 아무튼 오트슨은 처음으로 글을 쓰는 작가니만큼 여러모로 이야기가 딸렸나보다. 전형적이지 않은 구도를 찾는 쪽이 차라리 더 빠를 거라 여겨질 정도로 그는 미얄의 추천을 전형적이고 또 전형적이게 썼다. 라노베니만큼 이 말은 '캐릭터'를 전형적으로 썼다고 알아들으면 되겠다. 그리고 라노베니만큼 '캐릭터'를 전형적으로 쓰면 '구도'도 전형적이게 되버린다. 그런데 그 허물어진 콘테이너같은 엉성한 글 속에서도 그의 '이야기', 즉 아이디어는 여전히 반짝거리고 있다. 그게 또 언밸런스하다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내가 맨 위에서 썼듯이 독자들의 눈에는 꼭 '아이디어가 압사당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또 이런 말하긴 그렇지만, 오트슨은 글에 재능이 없으니까.


  이렇게 해서 내가 그리도 의문을 품던 '갑각나비---->미얄의 추천'이라는 진화 아닌 진화, 퇴화 아닌 퇴화는 벌어지고 만 것이다. 끔찍! 진짜 끔찍!! 갓 오트슨의 팬이 된 나로서는 재앙도 이런 재앙이 없다. 왜 하필 미얄의 추천을 쓸 때 나는 그의 팬이 된 것일까?

하지만 스스로를 타일러본다. 아직 희망은 있다. 두가지의 희망이다. 첫번째, 오트슨이 글발이 장난아니게 늘어서 아이디어를 잘 드러내게 된다. 두번째, 오트슨이 인터넷에 널린 갑각나비 찬양 + 미얄의 추천 비판 글을 보고서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곤 되도 않는 작가는 때려치고 필터를 깨뜨린다. 두가지나 되니 확률도 제법 있을 것 같지 않은가. 그럼 나는 그 중 한가지가 실현될 때까지 쭉~ 오트슨의 행동을 주도면밀하게 관찰하고 앉아있어야겠다.

물론 이 글은 가설이다. 가설에 억측이 난무하고 말도 안되는 단정과 비유가 산재해있다. 당연한 일이다. 내가 뭔 신도 아닌데 어떻게 오트슨의 심리와 별별 것들을 다 꿰뚫어내서 쓰겠어. 시벌. 하지만 나는 그의 팬이고 그의 팬으로서 그를 평가할 자격이 있다. 그니까 너무 태클은 걸지 말길 바란다. 아무튼 나는 저 두개라도 희망을 품고 싶으니까. 그리고 적절하게 리뷰 말미에서 외쳐줘야 하는 한마디.

「갑각나비 연재 다시 해!!!!!!! 이 빙신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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